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단 편집) === 리마 포위전(Cerco de Lima) ===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이후, 망코 잉카는 유판키에게 전갈을 보냈다. >'''"리마를 공격하고 침략자들을 없애버리라."''' 라는 것이었다. 단,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가급적이면 생포하라는 명령도 덧붙였다고 한다. 망코 잉카가 대체 왜 이러한 시점에서 리마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은 당시 잉카의 우세와 유판키의 활약과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덕분에 승리에 도취된 상태여서 그랬다고 보고 있다. 사실 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리마 공격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의 진출기지이자 본거지인 리마만 없다면 잉카 제국 내의 모든 스페인인들은 고립되는 신세가 되며, 쿠스코 역시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있냐는 것과 잉카군과 스페인군의 무장차이는 무려 '''4천년이라는 세월의 차이'''[* 잉카군은 가죽과 나무를 활용한 갑옷에 철제 무기가 없었고 돌팔매를 비롯한 돌 몽둥이가 기본이고 가장 높은 지휘관이 가지고 있는 구리를 이용한 몽둥이가 다 였던 반면 스페인군은 '''철제 갑옷과 병기'''는 기본에 총포와 대포도 있었다. 당연히 근접전에서는 돌 몽둥이와 돌 팔매가 철제갑옷을 낀 스페인군에게 유의미한 살상을 냈을리가 없었다. 유판키가 이길수 있었던 것도 총과 대포, 기마대들이 전혀 활약을 할 수 없는 산악전이라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지 평지에서는 스페인의 압살이었다.]가 있었다. 그동안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단순히 보급선과 지원군을 끊어먹기에 치중한 것으로 볼 때, 유판키는 리마 점령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라고 몇몇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어쨌거나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거부할 권한 따위 없었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유판키는 울며 겨자먹기로 리마를 포위하기 위해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리마를 포위한 지 6일째가 되었을 때 유판키는, >"오늘 리마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싸우다 죽기로 했다. 오늘 밤엔 리마로 들어가 스페인인들을 다 죽일 것이며, [[씨받이|스페인 여인들은 다 나눠가져서 힘세고 튼튼한 전사들을 낳는 데 쓸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네도 죽고, 내가 도망치면 너네도 도망친다는 것을 잊으면 아니 될 것이야!!!" 라고 부하들에게 연설한 뒤 총공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리마에 주둔중이던 스페인 병력은 '''약 100명'''이었고, 잉카군은 '''황제의 친위군 중에서 최정예였던 4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문제가 2가지 있었다. 첫째, '''스페인인들에게는 잉카인 동맹군이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인질이었던 시절,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자기 여동생인 키스페 시사(Quispe Sisa)를 시집보냈는데,[* 시집간 뒤 '''이네스 우아일라스'''(Inés Huayl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에 잉카 황족의 성(姓)으로 알려진 '유판키'(Yupanqui)를 붙여 "이네스 우아일라스 유판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이 여자의 어머니[* [[우아이나 카팍]] 황제의 부인들 중 한 명인데 비정되는 인물이 2명 있다. 첫 번째 후보는 [[아타우알파]]의 모후인 파차 두치셀라(Paccha Duchicela)로 전대 황제의 부인이자, 잉카 통일 이전 존재했던 키토 왕국의 여왕이었다. 두 번째 후보의 이름은 콘타르구아코(Contarguacho)로, 어딘가의 지도자('쿠라카'라고 하는데, 대충 잉카 제국의 지방 행정관 정도였다.)였다.]가 꽤나 든든했던 것이다. 장모님의 사랑은 그지없어서 사위인 피사로에게 '''20,000명'''의 원군을 보내주었다.[* 이로 인해 몇몇 후세 역사가들은 당시 잉카 제국은 사실상 키토파(아타우알파와 그의 어머니)와 쿠스코(우아스카르와 망코 잉카)파 간의 반 내전 상태였으며,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각각에 연줄을 댔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더군다나 피사로 만큼은 아타우알파 처형에 가장 반대했던 인물이고, 또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했던 모습을 장모가 모를리는 없었다. 결국 아타우알파에 대한 동정과 연줄이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둘째, 잉카인들은 전투 시에 [[총지휘관]]이 최전방에 나서는 관습이 있었다. 지휘관은 가마를 탔기 때문에, 잉카인들끼리의 싸움이라면 이들을 죽이는 게 영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잉카인들의 무기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스페인인들이었고 때문에 가마건 뭐건 일점사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인들은 '''그냥 맨 앞에 나서는 놈을 죽였더니 그게 바로 [[총사령관]]이었다'''고 한다. 셋째, 총과 대포, 기마대 활용이 힘든 산악전이 아닌 평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평지라면 기마대의 압도적인 기동력과 돌파력으로 살릴수 있는데다가 돌팔매나 돌 몽둥이가 주무기인 잉카군이 총,대포를 소지한 스페인군에게 그저 거대한 과녘에 불구했고 근접전에서도 철제무기와 방어구를 장착한 스페인군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도 못 했다. 당연히 3면을 동시에 공격한다 한들 지리적 이점은 스페인에게 있는 이상 소수의 스페인군이 잉카군을 압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유판키가 이끄는 잉카군은 대패했고 지휘관인 유판키도 전사했다. 이는 단순히 한 전투에서의 패배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리마와 쿠스코 사이에서 호랑이처럼 굳건히 버티던 유판키군이 사라지면서 다시 리마–쿠스코가 연결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잉카인들에게 다행인 것은 리마와 쿠스코 간의 거리가 워낙 먼데다가 리마에 주둔중인 스페인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어, 단기간 내에 리마에서 쿠스코를 지원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전투 이후 4개월이 더 지날 시점까지 쿠스코 포위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포위가 풀리기 전에 리마에서 구원병력이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워낙에 거리가 멀었던 탓에 포위가 풀리기 전까지 도착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